

| 조선의 사울 이기풍 목사 소개 |
| ‘조선의 사울’이라고 불리어지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선교사를
때려 눕힌 핍박자였으나 나중에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고 평양의 어두운 밤 하늘을 밝힌 한국의 새벽 별이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 최초의 7분 목사님들의 한 분인 이기풍 목사입니다.
그는 평양에서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어릴 때부터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을 미워했습니다.
그는 특히 서양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음흉한 계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 제주 최초 장로 김재원 |
| 김재원(金在元) 장로는 1878년 10월 5일(음) 제주도 제주군 제주면 이호리에서 부자 김진철(金進哲)과
김인애 사이 3남 2녀 중 큰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885년(8세) 때 한학을 공부하고, 1893년(16세) 도평리 윤사인과
최씨 사이인 무남독녀 도원(당18세)과 결혼했습니다. 김재원은 살림이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보내 어려서 한학 공부를 했고
유복하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뜻 하지 않게 늑막염처럼 배가 크게 부어오르는 병에 걸렸습니다. 부친은 좋다는 약은 모두 복용시키고
이름난 한의사를 불러 치료하게 하며, 백방으로 손을 썼으나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의학이 발달되지 못했던 때라 죽을 날만을 기다려야만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양에 가면 미국에서 건너온 에비슨(O. R. Avison) 선교사가 있는데 그 사람의 의술이 용하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어렵게 배를 빌려 인천(제물포)을 거쳐 한양으로 가 당시 제중원에서 의료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는 에비슨 선교사를 찾았습니다. 에비슨 선교사는 캐나다출신으로 1893년 제중원으로 부임하였습니다. 에비슨 선교사가 보기에도 사태가 심각했습니다. 치료를 거부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제중원에 맡겨놓고 제주도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에비슨 선교사가 김재원 청년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는다면 최선을 다해 시술을 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에비슨 선교사는 그렇게 하겠다는 김재원의 약속을 받고 수술을 했습니다. 김재원은 몇 개월간에 걸쳐 치료를 끝냈고 선교사와의 약속대로 세례를 받았는데 제주 사람 중 최초로 세례 받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김재원은 제주로 돌아와(이호리) 그가 갖고 온 쪽 복음서(마태복음)으로 전도했습니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옷을 들어 올려 수술자국을 보여주면서 죽다가 살아난 자신의 일을 간증하면서 전도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같이 모여서 쪽 복음서를 읽으며 나름대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집에는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놓고 복음을 전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제주도에 기독교를 처음으로 심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교회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평신도로서는 교회 운영에 어려움이 많아 교회의 기능을 목회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김재원은 급기야 자신에게 치료와 세례를 베푼 에비슨 선교사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제주도에 목회자를 파송해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 줄 것과 동시에 전도도 해야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때마침 조선예수교장로회가 독노회를 창립하여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총회 때 에비슨 선교사가 이 편지내용을 안건으로 붙였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평양신학 졸업생 7명에 대한 목사안수식이 있었고 또한 총회가 그들 7인 목사에게 "누가 제주에 갈 것인가"를 묻자 이기풍 목사가 이에 응해서 독노회 최초 선교사로 이기풍 목사를 제주로 파송하기로 하였습니다. 제주에 파송된 이기풍 목사는 산지포(현 제주항)에서 잠깐 동안 지내며 개인전도에 임하다가 김재원을 만나서 함께 기도하면서 열심히 선교하여 홍순흥, 김행권 등이 전도되어 향교골에 있는 김행권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제주도 성내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성내교회에서 김재원은 영수로 교회를 섬기다가 1917년에는 홍순흥과 함께 제주 최초 장로 장립을 받고 헌신했습니다. 그 후 1938년(61세) 회갑겸 장로장립 20주년 기념식을 거행했고, 여러 번 총회 총대로 참석했습니다. 그는 1945년(68세) 4월에 전남 보성군 겸백면 남양리로 피난 중, 8.15 조국 해방을 맞고. 10월 광주시 서석동 106의 2로 이사하여 1946년(69세) 4월 25일 광주 서석동 자택에서 소천하여 광주 방림동 기독교 묘지에?안장 후 1987년 10월3일 광주시 북구 망월동 광주공원 묘지로 이장했습니다. |
| 중인문 내력 / 제주성내교회와 관계되어 나타난... |
| 산지천은 제주성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승과 유적을 간직했던 명소였다.
한말까지만 해도 홍예교를 중심으로 동쪽 높은 언덕에는 공신정이, 서쪽에는 간성(間城)을 끼고 중인문(수복문)이 있었다. 이들 유적은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다. 곽흘목사가 1565년 동성을 산지천 동쪽언덕으로 확장하면서 1599년 목사 성윤문이 북과 남에 수구(水口)를 만들게 되었다. 공신정은 원래 북수구에 세웠던 문루(門樓)였다. 그러나 잦은 홍수로 홍예교가 무너지자 목사 이원진이 1665년 다리를 복원하면서 누각을 동쪽 둑 위에 세우고, 이름을 공신루(拱辰樓)로 지었다. 두보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높은 다락에서 북극성을 바라본다는 뜻이었다. 그 뒤 1831년 목사 이예연에 의해 지금의 제주측후소와 감리교회가 있는 높은 언덕으로
옮겨 세우게 됐다. 이 곳은 제주성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어서 여기에 오르면 성안은 물론 한라산에서 넓은 바다에 이르기까지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북성 홍문(虹門)은 북수구, 홍예교라고 불렀던 아름다운 돌다리였다. 곽흘목사가 산지천을 성내로 끌어들이기 위해 동성을 금산언덕 동쪽으로 확장했다. 그 뒤 목사 성윤문이 수구를 만들며 그 다리 위에 죽서루(竹西樓)라는 누각을 세웠다. 이 다리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여기에는 하나의 구전이 전해내려 온다. 사철 큰 물이 흐르는 산지천 위에 다리를 세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목사가 방을 내걸었다. 이 곳에 다리를 세운다면 양반이면 큰 상을 내릴 것이고, 상민이면 온갖 부역을 면제케 할 것이며, 비천한 자는 신분을 상민으로 고쳐주겠다는 것이었다. 이 방을 보고 한 석수(石手)가 나서며 목사에게 나무들을 충분히 마련해 준다면 한번 세워보겠다고 했다. 물 흐르는 하천 위에 다리를 세우려면 물을 막아야 하는데, 그 석수는 나무단을 쌓음으로써 물을 통과시키며 다리골조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한말의 문장가이며 외무대신을 지낸 운양 김윤식이 1897년부터 1901년까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남긴 '속음청사'를 보면 홍예교에 관련된 기록이 들어있다. "(공신루에서)석성(石城)과 마주치는 데를 굽어보니 수구에 홍예문이 지어져 그 위를 사람들이 왕래한다. 수문의 바깥은 백규(註: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로 약 35m)의 둑으로 둘러싸인 연못에 봄물이 넘실거리는데 오리떼가 열을 짓고 있다. 제방 위에는 버드나무가 빙 둘러있고, 언덕위에 집들이 있어 복숭아꽃이 곳곳마다 활짝 피어있다. 그림과 같은 풍경이다. 공신정 밑에는 세 곳에서 샘이 솟는데 천품(泉品)이 뛰어나다"라고 했다. 공신정에서 바라보는 산지천과 홍예문, 그 주변의 풍경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 지를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홍예교는 1927년 홍수로 무너지자 다시는 복원하지 않았다. 홍예교 서쪽에는 1780년 목사 김영수가 잦은 홍수를 막기 위한 간성을 구축했다. 성안
사람들의 바깥출입을 위해 남쪽에는 소민문, 북쪽에는 수복문을 세웠다. 이 문은 2층 누각으로 지어져 산지천과 주성(州城)의 품격을 한층 높이는 구실도 했는데 1914년 일제가
헐어버렸다. 산지천 주변은 제주성안의 대표적인 명승유적이 널려 있던 현장이었다. 이들 유적은 선인들이 낡으면 다시 고쳐 세우는 일을 반복하며 한말까지 이어져 왔다. 그것은 단순한 건물보수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 오랜 전통을 계승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는 내선일체를 꾀할 목적으로 공신루를 없애 그 곳에 신사를 지었다. 또 홍수로 다리가 무너지면 이를 복구하지 않고 내버리거나 중인문처럼 문루가 낡으면 그대로 방치하거나 철거해 버렸다. 자신들의 문화유적이라면 결코 쉽게 허물 수 없는 일들이다. 그게 모두 나라를 뺏긴 데서 비롯된 설움이었다. |
